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시스코 피사로 (문단 편집) === 라스 살리나스 전투(Batalla de las Salinas) === 망코 잉카가 퇴각하자 이제 남은 건 스페인인들간의 다툼 뿐이었다. 사실 망코 잉카가 물러나기 직전, 알마그로는 야간에 몰래 쿠스코에 들어가 프란시스코의 두 동생 에르난도와 곤살로, 그들을 따르는 20명의 스페인인들을 체포하는 데 성공한 상태였다. 문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리마에서 보낸 구원병력 500명이 쿠스코에 도착한 것이었다. 결국 알마그로의 군대와 리마의 피사로측 구원부대가 전투를 벌이게 되었으며 리마의 군대가 패배했다.{'''아반카이 전투'''(Batalla de Abancay)} 알마그로의 수하들은 피사로의 동생들을 참수해버리라고 권했지만, 어디까지나 알마그로의 목적은 "나도 피사로 만큼 땅을 갖고 총독이 되고 싶다"였고, 피사로 역시 두 동생의 안전을 원했기 때문에 양측은 협상에 나섰다. 협상 중재자인 변호사의 설득에 따라 알마그로는 피사로의 동생들을 일단 석방했지만, 이후 2개월 남짓 계속된 협상은 '''최종 결렬'''이었다. 결국 후세에 '''라스 살리나스 전투'''(Batalla de las Salinas)로 알려진 내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전투로 피사로 원정대 지휘관들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프란시스코 피사로 본인은 여전히 리마에 머물렀지만, 그가 보낸 구원병력은 쿠스코에 속속 도착하여 알마그로 쪽보다 병력이 약간 앞선 상태가 되었다. 양쪽 모두 원주민 전투부대의 지원을 받았는데, 알마그로의 경우 허수아비 황제로 파우유(Paullu)[* 황족으로서 알마그로를 따라 칠레 원정을 따라갔다가 망코 잉카의 봉기를 듣고, '''기회는 이때다며 스페인에 붙어먹어 황제가 되었다.''' 이후 스페인 측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1549년에 병사했다.]라는 인물을 내세워 그가 보낸 원주민 부대의 지원을 받았고, 피사로는 툼베스 + 키토의 장모님이 지원한 원주민 부대의 지원을 받았다. 최종 병력비는 알마그로: 스페인인 500명 & 원주민 6,000명 vs 피사로: 스페인인 700명 & 원주민 7,000명이었다. 격렬한 전투 끝에[* 알마그로 측의 스페인인 전사자가 150명 가량이었다고 한다. 그 외의 숫자는 불명이다.] 알마그로 쪽이 패배했다. 쿠스코 포위전 이후로 생고생을 거듭한 에르난도 피사로는 잔뜩 독기가 오른 상태였기에 '''알마그로와 그의 지휘관들 몇몇의 목을 매달아버렸다.''' [[디에고 데 알마그로]] 향년 63세(추정)였다. 이로써 반대파 세력이 거의 소멸된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페루]]의 지배자가 되었다. 알마그로를 처형한 뒤 피사로 가문의 둘째, 에르난도 피사로는 고국으로 돌아갔다. 어찌되었든 알마그로는 [[카를로스 1세]]가 임명한 총독이었기 때문에 그를 죽인 일에 대해 해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설명하면 아무 탈이 없을 줄 알았던 에르난도였지만, 망코의 봉기에 대한 책임소재 및 알마그로 살해 건 때문에 스페인에서 옥살이를 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